꽃으로 태어나 들풀로 사셔야 했던 그분 인생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아버지가 남기신 빚을 갚기 위해
서울로 떠나신 후, 다섯 살이던 저와 세 살이던 남동생은
시골에 계신 할머니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기억 속의 첫 어린 시절이 있겠지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은
할머니 손에 맡겨지고 1년이 지난, 여섯 살의 봄입니다.
그날, 도시 생활을 하고 있던 친척들이
저와 제 동생 문제로 할머니 댁을 찾았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할머니와 친척들의 대화는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큰아버지는 저와 제 동생에게 새 옷을 입혀주고, 새 신을 신겨주며,
좋은 곳에 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먹이시던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저희 남매의 손을 이끌고 문밖을 나섰습니다.
누구 한 명 따라 나서는 사람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저희 남매를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안 된다. 절대 못 보낸다 고아원에도, 아들 없는 집에도, 나는 못 보낸다.
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들 못 보낸다.
느그들한티 10원 한 푼 도와 달라고 안 헐라니까 보내지 마라.
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할머니의 눈물이 지금의 저희 남매를 있게 해준 것입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버지 없는 집에 보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인데
철이 들 무렵이 돼서야 알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의 집 일을 다니시며,
받아오신 품삯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저희 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셔야 했는지,
그리고 스스로 얼마나 억척스러워지셔야 했는지
그때는 어려서 몰랐습니다.
그저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새 옷 한 벌 없이 남의 옷만 얻어 입는 것이 불만이었고,
운동회 때 할머니랑 함께 달리는 것이 불만이었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동네에서 학교에서
불쌍한 아이 취급 받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 옷 한 벌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러 다니며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소풍 가는 손주들 김밥 한번 싸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른 아이들은 운동회 때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나이 드신 당신 몸으로 해주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지,
그때는 철이 없어 몰랐습니다.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하나 얻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당신 체면이나 얼굴을 버리시고,
오직 저희 남매를 위해 사신 분인데,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앉았다 하면 신세한탄이 먼저 나오는 할머니셨지만,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었고,
새 연필 한 자루라도 얻어 쓸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철없는 남매를 기르시면서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억척스럽고 강하게 보이셨지만,
사실 누구보다 여리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남의 집에 일하러 가셔서 새참으로 나온 빵을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오셔서 우리에게 주셨던 할머니...
매주 한 번 장에 나물을 팔러 가시는 날에는
꼭 순대 한 봉지라도 사오시는 분이셨습니다.
동생과 제가 싸울 때면 뒤란에 있던 탱자나무 가지로 종아리를 치셨지만,
금새 약을 발라주시며 눈물을 훔치는 분이셨고,
과자 하나 맘껏 못 사줘 미안하다며
문주를 부쳐주시고, 개떡을 쪄주시고,
가마솥 누룽지에 설탕을 발라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우산 대신 고추밭 씌우는 비닐로 온 몸을 둘러주시고
빨래집게로 여기저기 집어주시며,
"학교 가서 다른 아이들이 넌 우산도 없느냐고 놀리거든,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돌돌 싸매면
비가 한 방울도 못 들어와서 옷이 안 젖는다더라
너도 너네 엄마한테 나처럼 해달라고 해봐"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던 분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 시절이
스물 아홉 제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였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각각 천안과 예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는 주말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안에 빵과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남의 집 일 다니시며 새참으로 받은
우유와 빵을 냉장고에 넣어놓으신 것이었습니다.
남들 먹을 때 같이 드시지 유통기한이 다 지나서 먹지도 못하는 걸
왜 넣어 놓으셨냐고 화를 내면,
"니덜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야 말이지.
니덜 오먼 줄라고 냉장고에다 잘 느놨는디,
날짜가 지나서 워쩐다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면서 할머니를 가엾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제가
냉장고 속 가득한 빵과 우유를 버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직한 저는
돈을 벌게 되었고, 이제 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릴 수 있단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면 약재시장에 가서 좋다는 약재를 보내드리고,
할머니 생신이 다가오면 동네 할머니들과 식사라도 하시라고 용돈도 보내드리고,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와 장터 구경도 나가고,
명절에는 레스토랑에 모시고 가서 돈까스도 사드렸습니다.
처음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까스를 먹던 날,
할머니는 돈까스 한 접시에 음료까지 다 비우며 말씀하셨습니다.
"양두 얼마 안 되는 것이 참말로 맛나다,
이런 것이먼 몇 접시라도 먹것다."
저는 그 말에 또 눈물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이제 남은 소원이 제가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고,
이쁜 새끼 낳아 사는 거 보는 거라고 하셨는데,
할머니 소원대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했고,
다음 달이면 돌을 맞는 예쁜 딸아이도 낳았습니다.
할머니는 올해로 팔순이 됐습니다.
허리도 굽어지셨고, 검은 머리가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같이 할 수 없을 만큼 거동도 불편해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만 납니다.
제가 할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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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드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이었을까요?
수많은 단어가 있겠지만, 그 중 으뜸은 '부모님'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낳아서 길러주신 분만 ‘부모님’일까요?
가슴으로 낳아 사랑으로 길러준 분이 계시다면,
그분 또한 '부모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크신 사랑. 무엇으로도 다 갚을 순 없겠지만,
가장 큰 효도는 당신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큰 효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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